스크린 위에서 게임하기: 영화로 옮겨질 게임 기획

대한민국 뿐이 아니라 전세계의 오락실을 천하통일하다시피 했던 90년대 초반의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자타가 공인하는 메가히트 게임이었다. 세계를 호령한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인기에 '영화로 만들어 진다'는 소문이 흘러나왔고, 게임과 영화의 차이를 알면서도 많은 게이머들이 그 소식에 솔깃해 했다. 사상 처음으로 가상의 게임 주인공을 표지모델로 기용한 잡지가 출판되는 가운데 〈툼레이더〉의 성공은 90년대 후반을 가로지르며 영화로 만들어 진다는 소문으로 확산됐다. 게임의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가 게임을 떠나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라라를 보고 싶어하는 팬은 수퍼 아마조니아의 필름 강림을 기다렸다.

이윽고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조잡한 영화 몇 편을 거쳐 홍콩 최고 실력자들이 모인 〈스트리트 파이팅〉과 헐리웃 배우 2진이 모인 〈스트리트 파이터〉가 개봉되었고, 소문 많은 캐스팅을 거쳐 최적의 배역을 찾은 라라 크로프트는 안젤리나 졸리의 몸을 빌려 영화관에서 환생했다. 그리고 흥행에 앞서 엄청난 혹평 폭격에 고개 숙였다.

하지만 좋지 않은 결과만 눈에 걸리는 영화화된 게임계에는 아직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기대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레지던트 이블〉의 그럴싸한 만듦새에 이어 〈레지던트 이블 2〉도 과격한 아드레날린 분비를 자극하며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지금, 게임이 가진 풍부한 스펙트럼이 필름에 맺힐 가능성은 아직 충분하다.

최소한, 한국에서 〈올드보이〉를 낳은 만화만큼 넓은 독자를 아직 게임은 가지지 못했다.

앞서간 속편, 고고학 모험담 〈인디아나 존스〉의 후속 게임들

인디아나 존스 4

수많은 시나리오 작가를 거치고 거물 제작자와 감독과 배우의 스케줄을 각각 조절한 후에야 1989년을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았던 〈인디아나 존스〉의 속편이 제작에 단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톰 크루즈와 〈우주전쟁〉을 찍고 루카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3〉에 바쁘고 〈인디아나 존스〉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듯 보이는 해리슨 포드 영감님을 생각할 때, 속편의 제작 가능성이 밝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게임은 이미 1992년 첫번째 속편을 내놓았다.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나찌와 고대 유적을 다투는 모험담 〈인디아나 존스 : 아틀란티스의 운명〉이 바로 그 게임이다.

시나리오 검토 중인 〈인디아나 존스 4〉에 대한 해외 단신 중에 '아틀란티스 문명에 대한 시나리오'는 아마도 게임 〈인디아나 존스 : 아틀란티스의 운명〉에 대한 소식이었을 확률이 높다. 공식적으로도 〈인디아나 존스 4〉라고 불리곤 했던 이 게임은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 완성도 높은 게임플레이로 명성이 높았던 수작. 주인공 캐릭터의 행동과 탄탄한 배경줄거리가 중시되는 어드벤쳐 장르의 전성기 때 나온 게임은, 어드벤쳐라는 게임 장르의 특성상 영화로 만들기도 용이한 게임이기도 하다.(성공적인 게임 각색 영화 〈레지던트 이블〉이 바로 어드벤쳐 장르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그러나 게임 만의 오리지날 스토리로 이루어진 〈인디아나 존스 : 아틀란티스의 운명〉은 영화와 비교하자면 잘 쓴 팬픽에 가깝고 영화로 치자면 〈툼레이더〉정도의 과장이 많아 〈인디아나 존스〉 영화 시리즈의 속편으로 쓰기엔 이야기의 촛점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게임으로써는 성공적인 영화 각색 게임(영화도 게임으로 많이 각색된다)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을 만든 제작진이 그대로 투입되었고 이국적인 배경과 고대 문명, 로맨스와 신비주의가 잘 어울린 〈인디아나 존스〉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 〈인디아나 존스〉의 새 모험담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 이후로 속편을 내놓지 않는 사이, 게임 쪽도 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게임 판권을 가지고 〈인디아나 존스 : 아틀란티스의 운명〉을 만들었던 루카스아츠(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 게임 제작사)가 소품 〈인디아나 존스 : 데스크탑 어드벤쳐〉를 발표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수준 이하의 완성도에 금방 잊혀져 버렸고 영화가 점점 고전이 되어갈 수록 게임도 고전 시리즈가 되어갔다.

인디아나 존스: 인퍼널 머신

부활은 〈툼레이더〉에서 시작됐다. 영화가 아닌 게임 〈툼레이더〉가 발표되고 메가히트로 이어진 1996년, 고대 유적을 발굴하며 악당과 싸우는 라라 크로프트가 인디아나 존스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이 분명해졌을 때 루카스아츠의 제작진도 게임 속편을 기획했다. 그러나 이미 1996년은 어드벤쳐의 전성기가 지나 있었고 제작진도 〈인디아나 존스 : 아틀란티스의 운명〉 시절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안이하게 〈툼레이더〉의 형식을 쫓아간 속편 〈인디아나 존스 : 지옥의 기계〉는 1999년 발표되었고 종종 〈인디아나 존스 5〉로도 불리웠지만 범작 이상은 아니었다.

손쉽게 〈툼레이더〉를 따라한 게임플레이는 인디아나 존스를 격렬하게 움직이는 액션 게임으로 바꾸어 놓았고 〈툼레이더〉 식의 빈약한 배경 줄거리에 빈틈투성이 캐릭터가 움직이는 새로운 게임은 이미 〈인디아나 존스〉가 아니었다. 게임은 〈툼레이더〉를 즐긴 사람이 흥미삼아 찾을 만한 수준일 뿐, 예전 영화나 게임같이 수작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몇 년이 흘러 2003년도에 발표한 〈인디아나 존스 : 황제의 무덤〉에 이르러서는 〈인디아나 존스 6〉라고 부르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여전히 〈툼레이더〉를 벤치마킹한 게임플레이에 〈인디아나 존스 : 지옥의 기계〉때보다도 형편없는 시나리오는 유치함의 나락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인디아나 존스〉는 추억에 묻혀갔다.

비주얼의 유혹, 기괴한 동화 〈앨리스〉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

게임을 위한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는 게임을 위한 것이다. 게임에 밀착되어있는 시나리오일수록 훌륭한 게임을 만들 수 있지만 영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그럼에도 영화화를 유혹하는 게임이 있다면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상업적 성공이 있었거나 영상으로 옮겼을 때도 충분히 매력적인 비주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게다. 루이스 캐럴의 의미심장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기괴하게 해석한 게임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는 기발하고 해괴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경우다.

게임이 알려지기까지는 게이머들의 호응과 유명세가 기반이 되었지만 상업적인 지명도로 〈앨리스〉는 〈스트리트 파이터 2〉나 〈툼레이더〉정도의 게임이 아니었다. 토끼의 인도로 이상한 세계에 도착하는 앨리스의 이야기를 정신착란 소녀의 환상으로 해석하는 〈앨리스〉의 세계는 기발한 형식으로 디즈니의 이미지를 꼬아놓는다. 캐릭터의 이미지나 복장에서 월트 디즈니 버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이 게임은 밝고 신비로운 디즈니의 캐릭터를 잔혹하고 무시무시하게 재구성한다. 동화의 패러디로도 신선한 화면을 보여주며 적을 무찌르는 박진감있는 게임으로써도 충분한 재미를 지닌 이 게임의 비주얼과 진행은 기발한 컨셉의 B급 스릴러 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불안정한 정신 세계에 기반한 영화 〈장화, 홍련〉〈인드림스〉〈셀〉같은 영화를 기억한다면 〈앨리스〉를 플레이했을 때 영화관계자가 느낀 유혹을 알 만하다.

압도적인 플롯, 세련된 공포의 세계 〈사일런트힐〉

사일런트힐

배경줄거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게임이 영화화되며 만연한 편견 중에 하나는 '게임의 스토리는 단순하다'라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게임 원작 영화를 살펴보면 이해 못 할 오해도 아니긴 하다. 때문에 〈사일런트힐〉같은 게임의 영화화 시도가 반가운 지도 모르겠다. 이미 영화화된 캡콤의 히트작 〈바이오해저드〉(영화 제목은 미국 수출판을 따른 〈레지던트 이블〉)을 의식하며 시작한 〈사일런트힐〉 시리즈는 플래티넘 히트작 뒤를 따른 수많은 범작들이 실수하곤 하는 어설픈 모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긴장감 넘치고 이야기 진행이 박진감 있는 〈바이오해저드〉의 영화적인 구성을 형식적으로 모방하되 분위기와 진행에서 전혀 개성이 다른 게임을 만드는 것이다.

이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사일런트힐〉은 〈바이오해저드〉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아드레날린 넘치는 세련된 공포를 게이머에게 선사한다. 유령과 괴물과 정체를 짐작하기 힘든 인물이 주인공의 불안정한 정신상태와 착란을 거쳐 비주얼로 이어지는 〈사일런트힐〉은 (제목처럼) 고요하고 축축한 공포를 스멀스멀 가져온다. 심리적이고 복잡한 플롯을 선보이며 긴 호흡을 가진 이 게임은 기술적인 한계를 뛰어넘기위한 기술적 타협점(안개로 휩싸인 음침한 배경과 회색톤의 인물)마저도 공포의 도구로 이용하는 영악한 게임이기도 하다. 매 시리즈마다 기술과 이야기에서 세련된 공포의 영역에 도전하는 〈사일런트힐〉의 영화판 역시, 유려하게 꼬인 인간 심층 공포를 끌어낼 수 있을 듯 하다.

역사 속의 상상력, 영화배우가 출연하는 〈귀무자〉

귀무자

게임은 게임을 할 수 있는 게임기를 매개로 하여야 즐길 수 있다. 각종 생활편리를 제공하는 컴퓨터마저도 게임을 할 때면 게임기가 되는 셈이다. 게임기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지닌 일종의 컴퓨터라서 게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을 필요로 한다. 이런 프로그램 중에서 게임의 기본적인 진행을 통제하는 프로그램을 '게임엔진'이라 부르는데, 제목처럼 공학적인 결과물이다. 훌륭한 공학적 결과물이 그렇듯이 '게임엔진'도 개조를 거쳐 다른 제품에 쓰이곤 한다. 같은 회사에서 발표한 게임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이오해저드〉가 히트한 이후, 이 게임의 '엔진'은 몇가지 개조를 거쳐 다른 게임에도 이식되었다. 다른 시리즈의 토대를 이루며 개성은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게임은 비슷한 성격을 지니기 마련이다. 걸작 〈바이오해저드〉의 엔진을 토대로 나온 게임은 그 뿌리처럼 영화적인 화면을 선보이며 풍부한 내러티브를 내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 〈데빌 메이 크라이〉가 일본 만화적인 설정과 과장 탓에, 〈카오스레기온〉이 지나치게 거창한 배경 탓에 영화로 만들기 힘든 반면에 〈귀무자〉시리즈는 매우 영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일단은, 게임 주인공부터가 그렇다. 주 시리즈만 세 편을 선보인 〈귀무자〉는 매 시리즈마다 실제 배우의 얼굴을 입혀 게임에 배우를 '출연'시킨다. 압도적인 비주얼을 선보였던 1편은 아시아 전역에서 지명도 높은 중국계 일본인 '금성무'를 출연시키고, 볼륨과 게임성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한 2편은 고인이 된 일본배우 '마쓰다 유사쿠'를 출연시키는 괴력을 발휘하더니 최근에 발표한 3편에는 1편의 주인공 '금성무'와 함께 프랑스 배우 '장 르노'를 함께 출연시키는 깜짝쇼를 선보였다.

그렇다고 형편없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처럼 스타배우의 유명세만으로 게임을 끌어가는가 오해하면 섭섭하다. 게임은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배경줄거리를 토대로 스토리에 밀착한 액션의 합으로 짜여져 있고, 그 구조물은 매우 촘촘해서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기 힘들다. 약점이 있다면 일본 역사를 배경으로 삼은 탓에 월드릴리즈 영화로 만들기에 다소 어색함이 있다는 것.

아드레날린의 최고봉, 살육의 롤러코스터 〈둠〉

둠

영화화 리스트에 오른 전력이라면 미국 id사의 전설적인 게임 〈둠〉시리즈도 만만치 않다.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2〉만큼이나 새로운 장르를 정립시키다시피한 〈둠〉의 영향력은 수많은 게임 언론이 발표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있는 이 게임에 대한 찬사로 알 수 있다. 사격과 기동이 오묘한 퍼즐과 연계되어있는 〈둠〉의 인상적인 플레이는 아드레날린 분비를 자극하는 긴장감에 있어 어떤 게임도 따라오지 못 할 만큼 탁월하다.

짜임새 있고 이야기 거리가 풍부한 내러티브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둠〉 제작진은 게임의 강력한 액션과 원초적인 폭력에 기반하는 파괴력만으로 이 게임을 수많은 게이머와 영화제작진의 뇌리에 박아 놓았다. 게임에 특성때문에 영화화 되었을 때 이야기는 게임과 매우 다를 확률이 높은데, 스토리가 강조된다면 직선적이고 강렬한 게임의 액션을 잃게되고 액션이 강조된다면 스토리 빈약한 게임 원작 영화의 리스트를 추가시키는 미묘한 위치에 있는 게임이 되겠다.

최초의 작품이 1994년에 발표되어 장르를 개척한 이후, 최근에 신작 3편이 발표되었다. 그간의 변화 때문인지 〈둠〉시리즈의 특징이던 높은 기술적 완성도만큼이나 게임의 성격도 많이 달라졌다. 스토리가 매우 강조된 좀비물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 것.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인상적인 컷신과 게임화면으로 이루어진 〈둠3〉는, 시리즈의 특징이었던 박진감은 여전하지만 복잡하고 영화 같아진 스토리에 보조를 맞추느라 〈둠〉의 매력이었던 직선적이고 강력한 진행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아직까지 썩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는 〈둠3〉는 이전 작품과는 다소 이질적인 게임이지만 영화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동력을 제공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문은 가끔 사실이 된다. 연예인들의 가십 기사도 그렇지만 영화화한다는 게임에 대한 소문도 그렇다. 필름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 넣는 게임이 가진 에너지에 공명해 본 게이머가 느끼는 흥분이란, 새로운 생명을 얻는 분신을 보는 것과 같다. 게임이 영화화되는 새로운 지평에 선 게이머가 소문에 솔깃하는 건, 그런 이유다.

지난 포스트에 이어 게임과 영화와의 관계에 대해 기획한 무비스트특집기사(원문)의 속편입니다. 원래는 당시 영화 웹진으로 유명했던 엔키노(현재 폐간)처럼 장기 연재 기획물을 생각했었는데, 편집장이 난색을 표한 결과로 두 개로 나누어 연재하게 되었지요.(실제로는 연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만, 억지로 두 편은 나누었습니다.) 영화화 예정 게임의 정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쓴 기사인데, 시간이 지난 지금 보면 실제로 영화화 된 것은 그리 많지 않네요. 세월을 느끼게 하는 기사입니다. 원문을 수정 없이 그대로 옮겼습니다.


스크린 위에서 게임하기, 영화로 옮겨진 게임 기획

보고 듣고나서 선택하면 손가락이 움직이고 다음엔 화면 속 주인공이 움직인다. 게임은 관객의 결정이 화면 속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영화와 다르다. 방법이 조이스틱이건 키보드건 단순한 행동이라도 게임 속에서 게이머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그러니 게임을 영화로 바꾸어 놓으면 시시해질 수 밖에. 아귀가 맞지않고 빈틈 투성이 유치한 시나리오가 필름에 옮겨지면 엉터리 영화가 되지만, 게임에서는 수작이 될 수도 있다. 게임은 짜임새 있는 배경보다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니까. 필름과 조이스틱 사이의 간극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게이머가 강조하는 '손맛'이라는 것은 게임과 영화의 간극을 대표하는 존재다.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재미가 게임의 '손맛'에 숨어있고 서사를 자처하는 게임이 절대 따라 잡을 수 없는 호흡이 영화에는 살아있다. 영화와 게임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각색이 소설의 경우보다 훨씬 까다로운 것은 재미를 느끼는 위치 자체가 다른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최소한 소설과 영화는 내러티브에 관심을 갖지만, 훌륭한 게임이 꼭 내러티브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격투의 신천지, 오락실을 평정한 〈스트리트 파이터 2〉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1994)

전설적인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문제는 히트 게임을 영화화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캐릭터의 개성이 인기 원인인 게임을 영화로 옮기려면 게임 배경 이야기와 설정을 되도록 그대로 옮겨와야 하는데, 이것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던 것. 각색을 거쳐도 이야기는 치밀해지지 않아 〈람보〉도 울고 갈 유치찬란한 이야기로 완결되었고 영화는 수많은 졸작을 가진 장 클로드 반담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괴작이 되었다.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1994)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1994)

 

동남아 어느 국가를 장악한 군사집단 샤돌과 그에 맞서는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배경 이야기는 원작 게임에서 미국 대표 가일(영화에서 장 클로드 반담의 배역)과 중국 대표 춘리(영화에서 밍나 웬의 배역)의 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다. 영화는 기본줄거리를 핵심으로 각색한 기묘한 게임 캐릭터가 단연 압권으로 샤돌의 수장 바이슨 장군 역을 소화하는 라울 줄리아의 모습이 특히 허탈하다. 구미와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빅히트한 게임이다보니 각색한 괴작이 꼭 헐리웃에만 있는 것은 아닌데, 유덕화 - 곽부성 - 장학우 - 정이건의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이는 1993년작 홍콩영화 〈스트리트 파이팅〉은 원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거의 90%이상 들어냈음에도 캐스팅이 아까운 수준이고,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이제규 감독의 1993년작 한국영화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스텝과 배우 전부가 정신이 나가 있는 희대의 괴작 아동영화다.

아류의 B급 감수성, 비주류를 타고난 <모탈컴뱃〉

 

모탈 컴뱃Mortal Kombat 캐릭터 선택화면

모탈 컴뱃Mortal Kombat" 캐릭터 선택화면

 

오락실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던 1991년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출현 이후, 이 게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수많은 아류가 속출했으며 '대전격투'게임이 오락실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부분의 아류는 오리지날의 카리스마와 완성도를 따라오지 못했지만 그 중에는 탁월한 완성도로 '대전격투'라는 장르 자체를 한 뼘 이상 넓힌 수작도 있었다. 그러나 〈스트리트 파이터 2〉 이후 그만한 인기가 있던 게임은 많았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게임은 단 한 편, 미국 제작사 어클레임의 〈모탈컴뱃〉뿐이다.

일본 제작사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시리즈와 SNK의 〈아랑전설〉이 주도한 초창기 '대전격투'게임에서 미국적인 감수성으로 만들어진 어클레임의 〈모탈컴뱃〉은 동일한 장르의 게임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실제 배우를 촬영해 게임 캐릭터로 사용한 것이 〈모탈컴뱃〉의 특징. 잔혹함과 사실감 덕분에 구미에서의 인기는 상당했고 본 고장과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만화적인 과장과 연출이 결여되고 일본 제작사의 혁신적인 게임 스타일을 따라가지 못 한 <모탈컴뱃〉은 3편을 넘기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 〈모탈컴뱃〉은 구미권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전성기 시절에 만들어졌고 애시당초 B급 영화로 기획되었다. 배경 이야기가 대단하지 않기는 〈모탈컴뱃〉도 마찬가지 였지만, 만화적인 감수성이 다분한 일본 게임에 비해 영화로 옮기기는 쉬웠는지 영화판 〈모탈컴뱃〉은 꽤 즐기는 사람이 많은 B급 영화가 되었다. 당시에 한물 간 B급 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를 기용한 1995년 〈모탈컴뱃〉은 게임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쓰면서도 B급 영화 사이에서 괜찮은 평을 얻었던 작품.

 

모탈 컴뱃Mortal Kombat (1995)

모탈 컴뱃Mortal Kombat (1995)

 

가볍게 B급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목표로 만든 영화임을 감안하면 〈모탈컴뱃〉은 제법 볼 만 하다. 이 영화를 만든 폴 앤더슨 감독이 이후 〈레지던트 이블>이나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같은 결과물을 낸 것을 보면 게임을 각색하는데 재능이 있다고 인정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작은 성공 이후 속편도 나왔고 TV시리즈도 나왔지만 첫 작품 〈모탈컴뱃〉을 뛰어넘지는 못 했다. 물론 게임도 그랬고.

키치 소녀의 메이저 진출, 인디아나 존스와 홍콩느와르의 잡종교배 〈툼레이더〉

 

여걸 인디아나 존스, 라라 크로프트여걸 인디아나 존스, 라라 크로프트

 

대자본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영화는 조금 다르긴 했다. 영국의 독립제작사 코어 디자인이 만든 〈툼레이더〉는 유럽과 미국에서 놀랄만한 히트를 기록하는데 게임 주인공이 CF에 단독 출연하고 시사주간지 표지모델을 장식할 정도였다. 워낙 구미권 취향의 게임이다보니 일본과 한국 등지에서는 주목 받는 수준이었지만 '손맛'은 좋은 게임이었다.

만화와 헐리웃 영화를 즐기는 청년들로 이루어진 코어 디자인의 게임 제작진은 스펙타클한 고대 유적을 배경으로 쌍권총을 휘두르며 활약하는 게임을 착안한다. 간단한 조종으로 다양한 액션을 연출하는 〈툼레이더〉의 게임 디자인은 매우 완성도가 높았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영향받은 함정과 비밀로 가득한 고대유적도 게임을 풀어 나가기엔 흥미로운 배경이 되어 주었다.

게임으로써 게이머와 교감하는 '손맛'이 훌륭한 수작 게임이었던 셈. 게임 제작진의 대부분을 구성하며 〈툼레이더〉를 구매한 대부분의 고객을 구성하는 성별이 남성인 것을 감안하면 쌍권총을 들고 유적을 헤집는 주인공이 가슴 크고 핫팬츠를 입은 미녀인 이유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남은 것은 게임의 매끈한 컨셉을 적당히 받쳐줄 낭만적인 배경 이야기를 만드는 것 뿐이다.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의 엄청난 인기를 등에 업고 헐리웃 메이져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가 엉성하고 소년 취향의 환상으로 가득한 게임 〈툼레이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고아 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을 상속받은 거부에 옥스포드 졸업에 공수부대급 육체능력을 가진 완벽함이 라라의 인기요인이었으니까. 덕분에 영화 〈툼레이더〉는 인물 사이의 긴장과 드라마를 허락하지 않는 지나치게 완벽한 주인공을 데리고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근본적으로 뻣뻣한 드라마를 스펙타클한 스턴트로 수습할 수 밖에 없었다.

라라의 캐릭터에 인간미를 더하려고 했던 〈툼레이터2〉도 결국 라라의 완벽함을 근본적으로 손 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드라마로는 시시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결국 영화 〈툼레이더〉는 라라와 놀랄만큼 일체가 된 스타 안젤리나 졸리를 즐기는 맥빠진 작품이 되었다.

좀비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좀비척살게임 〈하우스 오브 데드〉

 

하우스 오브 데드 3 House of the Dead 3

하우스 오브 데드 3 House of the Dead 3

 

게임의 관심사는 영화에 비하면 지엽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좀비같은 경우다. 느릿느릿 나타나는 비인간적 무리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조지 로메로 류의 좀비 영화와 비교하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적 좀비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 세가의 게임 〈하우스 오브 데드〉는 덤벼드는 적을 볼링핀처럼 쓰러트리는 쾌감에 집중한다.

실제 모형총을 게이머가 들고 화면 상에 나타나는 좀비를 사격하는 '체감게임'은 좀비가 나타나는 정황의 공포나 홀로 남겨진 외로움의 경악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덤벼드는 적만큼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하고 적을 꼬꾸라트리는 손맛 이 좀비척살게임 〈하우스 오브 데드〉에는 존재한다. 영화로 치자면 〈하우스 오브 데드〉의 매력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공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흥분에 있다.

짧은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자극을 즐기는 오락실 환경에 최적화된 〈하우스 오브 데드〉는 스토리를 알기 조차 힘든 오락실 게이머의 특성을 고려하여 앙상하기 이를 때 없는 기둥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좀비가 들끓는 집에 권총 한 자루 들고 쳐들어가 적을 사살하는 게임에 뭐 복잡한 이야기가 필요하겠느냐 마는 세심하게 디자인한 다양한 좀비가 등장하는 게임에는 그에 걸맞는 화려한 이야기가 필요한 법이다. 오히려 좀비가 나타난 이유조차도 알기 힘든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보다는 〈하우스 오브 데드〉 쪽이 일목요연한 이야기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하우스 오브 데드House of the Dead (2004)

하우스 오브 데드House of the Dead (2004)

 

사실 〈하우스 오브 데드〉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 게다. 이 게임의 이야기는 짜임새와는 담을 쌓고 주인공이 좀비가 가득한 집에 들어가야 하는 최소한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니까. 용감하게 만든 영화판 〈하우스 오브 데드〉는 원작의 앙상하고 유치찬란한 배경 이야기를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원작이 가지고 있던 사격의 쾌감, 명중의 흥분에 집중한다. 좀비가 들끓는 섬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청년에게선 공포를 찾기 보다 광란을 찾기가 쉽다. 하지만 영화에서 게임의 '손맛'을 살리는 것에는 실패한 듯 미국에서의 흥행 참패에 이어 한국에서도 곧장 비디오로 직행했다.

좀비와 음모론의 만남, 아드레날린으로의 초대장 〈레지던트 이블〉

 

'인기
인기 호러 시리즈 바이오하자드

 

멍청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임 출신 영화에 실망할 때 쯤, 폴 앤더슨이 감독한 〈레지던트 이블〉은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음모론과 첩보물을 B급 괴수물과 연결시켜 좀비 영화로 만든 영화의 짜임새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다. 패소공포증과 좀비를 늘어놓는 영화의 장면이야 참신과는 거리가 있지만 장르의 규범에 잘 맞추어 흥미롭고 음모와 좀비를 연결시킨 플롯도 재미가 쏠쏠하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레지던트 이블〉의 배경 이야기는 캡콤의 원작〈레지던트 이블〉 게임 시리즈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 게임판 〈레지던트 이블〉의 배경 이야기가 매우 영화적이라는 점이다.

게임에도 많은 장르가 존재한다. 매체가 다른 만큼 영화의 장르 구분과는 전혀 다르게 구분되는 게임의 장르 중에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치밀한 연출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장르가 있다. 오락실을 지배하는 빠르고 격렬한 게임이나 온라인을 지배하는 지리멸렬한 앵벌이 게임 사이에 있는 '어드벤쳐'라는 장르의 게임은, 게이머가 주인공의 대화와 행동을 지시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플롯과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이다. 빠른 판단력과 반사신경보다는 상상력과 이야기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어드벤쳐'게임은 가장 영화나 소설과 닮아있고 이야기가 풍부한 게임이기도 하다.

성공적인 영화 각색 게임(〈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과 고전적인 탐정물과 추리물(〈진구지 사부로〉 시리즈), 음산하고 복잡한 호러물(〈사일런트힐〉 시리즈)같이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은 대부분 '어드벤쳐' 장르를 기반으로 삼고있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 역시, 큰 히트를 한 캡콤의 호러 어드벤쳐 <바이오하자드〉(미국 수출판 제목이 〈레지던트 이블〉이다)를 각색한 작품이다.

생물학 실험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군산복합기업 엄브렐라의 음모와 좀비 바이러스, 강력한 인공지능, 돌연변이 생물병기, 비밀스러운 빅토리아풍 저택 같은 〈레지던트 이블〉의 소재는 〈헌티드힐〉〈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에일리언〉같은 B급 영화와 SF의 단골손님이기도 하지만 원작 게임이 그대로 가지고 있던 설정이기도 하다.

외딴 저택이 엄브렐라의 핵심 시설 '하이브'로 이어지는 기둥 줄거리와 장면 구성은 실종된 대원을 찾아 정체불명의 저택으로 들어왔던 등장인물만 교체한 체 그대로 진행된다. 인체실험 후 깨어난 주인공 앨리스(밀라 요요비치)가 발견하는 폐허 도시가 인상적인 엔딩은 〈매드니스〉나 〈28일후〉같은 황량한 공포물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원작 게임 〈바이오하자드2〉와 〈바이오하자드 3〉의 오프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속편인 〈레지던트 이블 2〉는 좀비 바이러스에 의해 전 시민이 좀비가 된 라쿤시티와 실험 실패를 무마하려는 군산복합체 엄브렐라의 음모를 중심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담이 전개되는 전형적인 좀비물이다. 넓어진 무대와 많아진 좀비, 더 더러워진 음모로 업그레이드된 속편은 헐리웃의 속편 공식 임과 동시에 게임〈바이오하자드 2〉〈바이오하자드 3〉의 전략이기도 했다. 더구나 원작 게임 팬이라면 <바이오하자드 3〉와 똑같은 복장으로 등장하는 질 발렌타인(시에나 길로리)의 모습에 열광할 지도 모르겠다.

때로 '아이들 전자오락'과 유치한 영화를 동일시하는 평자들의 무지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수작 게임이 유치한 영화가 되는 것은 게임이 '유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과 영화가 전혀 다른 자극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매체기 때문이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유치해 지는 것은 소설 각색의 100분의 1 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제작진의 무성의 때문이다. 원작의 매력을 잘 알고있는 〈레지던트 이블 2〉에 기뻐하는 것은 그런 작은 애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름에서 '손맛'을 느끼는 애정.

 

원작을 게임으로 둔 영화 중에 잘 나온 편으로 유명했던 〈레지던트 이블 2〉 개봉 즈음하여 무비스트에 2004년 11월 4일에 게재한 기사입니다. 게임에 대한 애정을 담으려고 했던 기사인데, 긱스런 글이 되고 말았네요. 나름에 게임 원작 영화에 대해 바라는 점이나 매력을 담으려 했는데, 그냥 긱스럴 뿐입니다. 원문 그대로 옮기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낯설지만 낯익은 작가, 〈스텝포드 와이프〉의 아이라 레빈 기획

익숙함은 정보를 나열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재즈에 익숙하다면, 유명한 재즈곡을 나열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익숙한 음악에 관해 종합할 수 있으며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스필버그의 영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스필버그 영화를 나열할 수 있고, 나열할 영화를 종합해서 스필버그 영화는 어떤 영화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또, 새로운 스필버그의 영화가 개봉하면 그 영화가 '스필버그다운' 영화인지도 판단할 수 있다.

(Left to right) Claire Wellington (GLENN CLOSE), Joanna Eberhart (NICOLE KIDMAN), Bobbie Markowitz (BETTE MIDLER) and Carol Wainwright (LISA MASTERS) enjoy each other's company over a cup of tea in DreamWorks Pictures' THE STEPFORD WIVES. Film Title:  The Stepford Wives. Quality: Original. Photo Credit: Andrew Schwartz. (tm) & ?2004 by DreamWorks LLC and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그런 의미에서 우린, 아이라 레빈에 대해 익숙하지 못하다.

아이라 레빈

미국 펄프픽션 작가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꼭 아이라 레빈의 경우 만은 아닐게다. 사실 한국사람이 미국 펄프픽션 작가에 대해 잘 알아야 될 이유도 없다. 가뜩이나 학창시절부터 세계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자라난 한국의 성인에게 미국 펄프픽션까지 관심을 기울여야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다만 펄프픽션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펄프픽션을 원전으로 한 영화는 무척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많은 한국 관객이 그런 영화에는 익숙하다. 자신도 모르게 [LA컨피덴셜][조지클루니의 표적]같은 영화를 거쳐 미국 싸구려 범죄소설을 알아 버렸고, 기괴한 취향의 [파이트클럽]같은 영화를 거쳐 펄프픽션에 맛을 들이고 말았다. 아,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을 연상해도 좋겠다. 타란티노야 말로 미국 펄프픽션을 온몸으로 체득해 영화로 옮긴 남자니까.

다음 순서는? 이미 익숙해진 것, 확인해 보자는 것이지

[스텝포드 와이프The Stepford Wives] (1972)

스텝포드 와이프
밝고 유머러스한 영화지만 어딘지 소름끼치는 이야기, [스텝포드 와이프]는 완벽한 스텝포드 마을을 통해 기괴한 상상을 펼친다. 모두가 금발에 아름다운 스텝포드 마을의 아내들이 죄다 인조인간이라는 상상이 [스텝포드 와이프]의 큰 얼개다. 여기엔 물론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갔다가 인조인간으로 대체되기에 이른 조안나(니콜 키드먼)가 있다.

어쩐지, 지나치게 완벽하고 요란하게 왁자지껄한 마을이 범상치 않더라니. 유머와 기발한 착상이 결합하여 조금은 서늘한 이야기로 전개하는 [스텝포드 와이프]는 1972년에 출판된 아이라 레빈의 동명소설에 기반한다. 주인공과 이야기 얼개를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스텝포드 와이프]는 공포와 유머를 절묘하게 섞을 줄 알았던 아이라 레빈의 재능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소재의 스펙트럼이 넓은 레빈 소설의 특징이 잘 드러난 [스텝포드 와이프]는 SF소설의 인조인간을 음모에 접목 시켜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기의 여신 니콜 키드먼이 타이틀롤을 맡고 베트 미들러와 글렌 클로즈에 페이스 힐까지! 뒤를 받쳐주는 영화판 [스텝포드 와이프]는 스타의 화려함에 비해 영화는 재미가 없는 편이다. 레빈 소설의 기발함을 단선적으로 따라 가기만 하는 이야기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유머와 긴장감이 미처 나올 틈도 없이 리듬을 놓쳐버린다. 영화판이라면 오히려 1975년에 처음 영화화 되었던 [스텝포드 와이프]가 더 볼만하다.

이미 3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라 연출 자체는 구닥다리지만 원작의 기발한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살린 영화는 훨씬 흥미진진하다. 조안나 역의 캐서린 로스는 지금 관객에게도 [내일을 향해 쏴라]같은 영화로 익숙한 배우. 물론 30년도 더 된 [스텝포드 와이프]의 최초 영화판은 2004년 한국에서 구하기 매우 어려운 영화다.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번외편 TV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복수Revenge of Stepford Wives](1980)나 [스텝포드 아이들The Stepford Children](1987)은 물론이고.

[브라질에서 온 소년The Boys from Brazil] (1976)

브라질에서 온 소년
아이라 레빈이 인조인간같은 SF적 소재에 일가견이 있음은 [스텝포드 와이프]보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에서 잘 드러난다. 복제가 처음 이슈로 떠오를때 발표한 이 소설은 극적구성의 치밀함과 박진감에서 레빈의 최고 소설 중 하나다.

처음 이야기는 나치 전범 사냥꾼인 사이먼 위젠탈이 나치 시절 생물학 권위자였던 멩겔레 박사의 음모를 제보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북미와 유럽에 흩어져 있는 65세 남자 94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것. 이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나이의 남자아이들 양자로 들이고 있었고, 위젠탈은 결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생긴 사실을 밝혀내고 경악한다. 모두가 14세 소년들, 과거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도 히틀러가 14세 되던 해 죽었다.

아직 복제기술이 체계도 잡히기 전 발표한 이 소설은 복제방법의 세밀함이 최근의 영화보다도 뛰어나다. 복제를 다룬 최근의 작품 어떤 것도 [브라질에서 온 소년]의 성과를 따라잡지 못했다. 최소한 이 소설은 인간을 복제한다고 처음부터 모든 능력이 똑같거나 복제한 직후부터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잠재력을 가진 쌍둥이일 뿐. 주제의식과 전개도 대단해서 소설을 한 번 잡으면 놓기 힘들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소설이 번역 출간되어있다. 망해버린 고려원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1991년에 출판되었다.

레빈 소설의 백미답게 소설이 발표되고 2년후 1978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설의 기본 얼개를 그대로 따라가는 영화는 소설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흥미진진한 수작인데, [혹성탈출]의 명장 프랭클린 샤프너가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레고리 펙을 기용해 만든 작품이다. 국내의 경우 구하기는 힘들지만 이미 DVD로도 발매되어있고 공중파를 통해서도 방영된 바 있다.

[로즈마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

로즈마리의 아기
영화화된 레빈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구하기 쉬운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로즈마리의 아기]겠다. 공포영화팬 사이에서 고전으로 유명한 이 소설은 영화의 경우 DVD샾이나 약간 큰 규모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 역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번역 수준도 썩 괜찮다. 영화의 경우는 최근에 DVD가 새로 발매되었으니 화질이나 음향에서 만족할 수 있을 듯. 미국의 경우 레빈이 1997년에 [로즈마리의 아들Son of Rosemary]라는 속편도 출판했다.

신혼부부로 운좋게 좋은 아파트를 싸게 구한 로즈마리 부부가 겪게 되는 악몽이 [로즈마리의 아기] 기본 줄거리다. 로즈마리는 임신을 하게 되지만 불길한 악몽을 자꾸 꾸게되며 완벽하게만 보였던 아파트 이웃과 심지어 남편까지도 점점 불안하게 느껴진다. 데미 무어 주연의 [세븐사인]같은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이 오컬트 고전은 영화가 소설과 난형난제인 보기 드문 예다. 소설의 핵심을 미끈하게 각색하여 느긋하게 연출한 감독은 [물속의 칼][피아니스트]로 이름 높은 로만 폴란스키. 점점 불안해만 지는 로즈마리를 연기한 미아 패로도 훌륭하고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존 카사베츠를 남편역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다.

[죽음 전의 키스A Kiss before Dying] (1956)

죽음 전의 키스
아이라 레빈의 장편 데뷔작인 [죽음 전의 키스]는 두번이나 영화화 되었다. 처음 영화화 되었던 거드 오스왈드 감독의 1956년판의 경우 한국에서 볼 수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제임스 디어던이 감독한 1991년판은 중소규모 이상의 비디오 대여점을 잘 뒤지면 찾을 수 있다. 두 편 모두 스릴러로써 재미는 평범한 수준.

야망이 넘치는 청년의 음모를 다룬 [죽음 전의 키스]의 플롯은 [태양은 가득히]의 도시 버젼 같다. 성이 바뀌고 플롯도 좀 더 복잡해졌지만, 풍기는 뉘앙스는 비슷하다. 비슷한 스릴러가 많아진 최근에 비교해도 [죽음 전의 키스]는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친다. 남성 관객이라면 1991년판에서 관능적인 숀 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슬리버Sliver] (1991)

슬리버
이번에 개봉하는 [스텝포드 와이프]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아이라 레빈 원작 영화는 샤론 스톤이 주연한 [슬리버]겠다. 영화의 마케팅 전략 덕분에 원작소설도 함께 번역이 되어 나와있는데, 원작도 레빈의 다른 작품에 비해 범작이지만 영화는 더 심한 감이 있다. 조 에스터하즈의 각색도 불성실했지만 무엇보다도 [원초적 본능]의 성공 이후 샤론 스톤의 관능미에 총력을 기울여 만든 영화의 한계가 지나치게 많은 허술함을 만들어냈다. 오히려 영화 [슬리버]의 경우, 샤론 스톤이나 플롯보다도 넘버원 히트곡 [Can't help falling in Love]을 삽입곡으로 기억하는 관객이 더 많을 듯.

헐리웃에서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스티븐 킹만큼이나 아이라 레빈도 영화로 많이 만들어 지는 소설가다. 오히려 작가로서 스펙트럼과 강렬함은 더 빼어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문득 신작 [스텝포드 와이프]에서 레빈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전 영화를 곰곰히 되짚어보게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레빈의 이름때문일까.

당시 개봉 대기 중이던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에 맞추어 원작자인 아이라 레빈에 대해 다룬 무비스트특집 기사(원문)입니다. 참신한 분석이나 통찰보다는, 다른 매체에서는 잘 다루지 못할 정보를 정리한다는 접근이었기 때문에 소식 나열 수준이지요. 제 기사가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원 기사는 2004년 10월 4일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를 쓸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로즈마리의 아기〉의 경우 국내 개봉 제목은 〈악마의 씨〉였지요. 제 실수 입니다. 원문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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