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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낯익은 작가, 〈스텝포드 와이프〉의 아이라 레빈 기획

익숙함은 정보를 나열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재즈에 익숙하다면, 유명한 재즈곡을 나열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익숙한 음악에 관해 종합할 수 있으며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스필버그의 영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스필버그 영화를 나열할 수 있고, 나열할 영화를 종합해서 스필버그 영화는 어떤 영화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또, 새로운 스필버그의 영화가 개봉하면 그 영화가 '스필버그다운' 영화인지도 판단할 수 있다.

(Left to right) Claire Wellington (GLENN CLOSE), Joanna Eberhart (NICOLE KIDMAN), Bobbie Markowitz (BETTE MIDLER) and Carol Wainwright (LISA MASTERS) enjoy each other's company over a cup of tea in DreamWorks Pictures' THE STEPFORD WIVES. Film Title:  The Stepford Wives. Quality: Original. Photo Credit: Andrew Schwartz. (tm) & ?2004 by DreamWorks LLC and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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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우린, 아이라 레빈에 대해 익숙하지 못하다.

아이라 레빈

미국 펄프픽션 작가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꼭 아이라 레빈의 경우 만은 아닐게다. 사실 한국사람이 미국 펄프픽션 작가에 대해 잘 알아야 될 이유도 없다. 가뜩이나 학창시절부터 세계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자라난 한국의 성인에게 미국 펄프픽션까지 관심을 기울여야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다만 펄프픽션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펄프픽션을 원전으로 한 영화는 무척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많은 한국 관객이 그런 영화에는 익숙하다. 자신도 모르게 [LA컨피덴셜][조지클루니의 표적]같은 영화를 거쳐 미국 싸구려 범죄소설을 알아 버렸고, 기괴한 취향의 [파이트클럽]같은 영화를 거쳐 펄프픽션에 맛을 들이고 말았다. 아,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을 연상해도 좋겠다. 타란티노야 말로 미국 펄프픽션을 온몸으로 체득해 영화로 옮긴 남자니까.

다음 순서는? 이미 익숙해진 것, 확인해 보자는 것이지

[스텝포드 와이프The Stepford Wives] (1972)

스텝포드 와이프
밝고 유머러스한 영화지만 어딘지 소름끼치는 이야기, [스텝포드 와이프]는 완벽한 스텝포드 마을을 통해 기괴한 상상을 펼친다. 모두가 금발에 아름다운 스텝포드 마을의 아내들이 죄다 인조인간이라는 상상이 [스텝포드 와이프]의 큰 얼개다. 여기엔 물론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갔다가 인조인간으로 대체되기에 이른 조안나(니콜 키드먼)가 있다.

어쩐지, 지나치게 완벽하고 요란하게 왁자지껄한 마을이 범상치 않더라니. 유머와 기발한 착상이 결합하여 조금은 서늘한 이야기로 전개하는 [스텝포드 와이프]는 1972년에 출판된 아이라 레빈의 동명소설에 기반한다. 주인공과 이야기 얼개를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스텝포드 와이프]는 공포와 유머를 절묘하게 섞을 줄 알았던 아이라 레빈의 재능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소재의 스펙트럼이 넓은 레빈 소설의 특징이 잘 드러난 [스텝포드 와이프]는 SF소설의 인조인간을 음모에 접목 시켜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기의 여신 니콜 키드먼이 타이틀롤을 맡고 베트 미들러와 글렌 클로즈에 페이스 힐까지! 뒤를 받쳐주는 영화판 [스텝포드 와이프]는 스타의 화려함에 비해 영화는 재미가 없는 편이다. 레빈 소설의 기발함을 단선적으로 따라 가기만 하는 이야기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유머와 긴장감이 미처 나올 틈도 없이 리듬을 놓쳐버린다. 영화판이라면 오히려 1975년에 처음 영화화 되었던 [스텝포드 와이프]가 더 볼만하다.

이미 3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라 연출 자체는 구닥다리지만 원작의 기발한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살린 영화는 훨씬 흥미진진하다. 조안나 역의 캐서린 로스는 지금 관객에게도 [내일을 향해 쏴라]같은 영화로 익숙한 배우. 물론 30년도 더 된 [스텝포드 와이프]의 최초 영화판은 2004년 한국에서 구하기 매우 어려운 영화다.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번외편 TV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복수Revenge of Stepford Wives](1980)나 [스텝포드 아이들The Stepford Children](1987)은 물론이고.

[브라질에서 온 소년The Boys from Brazil] (1976)

브라질에서 온 소년
아이라 레빈이 인조인간같은 SF적 소재에 일가견이 있음은 [스텝포드 와이프]보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에서 잘 드러난다. 복제가 처음 이슈로 떠오를때 발표한 이 소설은 극적구성의 치밀함과 박진감에서 레빈의 최고 소설 중 하나다.

처음 이야기는 나치 전범 사냥꾼인 사이먼 위젠탈이 나치 시절 생물학 권위자였던 멩겔레 박사의 음모를 제보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북미와 유럽에 흩어져 있는 65세 남자 94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것. 이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나이의 남자아이들 양자로 들이고 있었고, 위젠탈은 결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생긴 사실을 밝혀내고 경악한다. 모두가 14세 소년들, 과거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도 히틀러가 14세 되던 해 죽었다.

아직 복제기술이 체계도 잡히기 전 발표한 이 소설은 복제방법의 세밀함이 최근의 영화보다도 뛰어나다. 복제를 다룬 최근의 작품 어떤 것도 [브라질에서 온 소년]의 성과를 따라잡지 못했다. 최소한 이 소설은 인간을 복제한다고 처음부터 모든 능력이 똑같거나 복제한 직후부터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잠재력을 가진 쌍둥이일 뿐. 주제의식과 전개도 대단해서 소설을 한 번 잡으면 놓기 힘들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소설이 번역 출간되어있다. 망해버린 고려원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1991년에 출판되었다.

레빈 소설의 백미답게 소설이 발표되고 2년후 1978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설의 기본 얼개를 그대로 따라가는 영화는 소설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흥미진진한 수작인데, [혹성탈출]의 명장 프랭클린 샤프너가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레고리 펙을 기용해 만든 작품이다. 국내의 경우 구하기는 힘들지만 이미 DVD로도 발매되어있고 공중파를 통해서도 방영된 바 있다.

[로즈마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

로즈마리의 아기
영화화된 레빈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구하기 쉬운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로즈마리의 아기]겠다. 공포영화팬 사이에서 고전으로 유명한 이 소설은 영화의 경우 DVD샾이나 약간 큰 규모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 역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번역 수준도 썩 괜찮다. 영화의 경우는 최근에 DVD가 새로 발매되었으니 화질이나 음향에서 만족할 수 있을 듯. 미국의 경우 레빈이 1997년에 [로즈마리의 아들Son of Rosemary]라는 속편도 출판했다.

신혼부부로 운좋게 좋은 아파트를 싸게 구한 로즈마리 부부가 겪게 되는 악몽이 [로즈마리의 아기] 기본 줄거리다. 로즈마리는 임신을 하게 되지만 불길한 악몽을 자꾸 꾸게되며 완벽하게만 보였던 아파트 이웃과 심지어 남편까지도 점점 불안하게 느껴진다. 데미 무어 주연의 [세븐사인]같은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이 오컬트 고전은 영화가 소설과 난형난제인 보기 드문 예다. 소설의 핵심을 미끈하게 각색하여 느긋하게 연출한 감독은 [물속의 칼][피아니스트]로 이름 높은 로만 폴란스키. 점점 불안해만 지는 로즈마리를 연기한 미아 패로도 훌륭하고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존 카사베츠를 남편역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다.

[죽음 전의 키스A Kiss before Dying] (1956)

죽음 전의 키스
아이라 레빈의 장편 데뷔작인 [죽음 전의 키스]는 두번이나 영화화 되었다. 처음 영화화 되었던 거드 오스왈드 감독의 1956년판의 경우 한국에서 볼 수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제임스 디어던이 감독한 1991년판은 중소규모 이상의 비디오 대여점을 잘 뒤지면 찾을 수 있다. 두 편 모두 스릴러로써 재미는 평범한 수준.

야망이 넘치는 청년의 음모를 다룬 [죽음 전의 키스]의 플롯은 [태양은 가득히]의 도시 버젼 같다. 성이 바뀌고 플롯도 좀 더 복잡해졌지만, 풍기는 뉘앙스는 비슷하다. 비슷한 스릴러가 많아진 최근에 비교해도 [죽음 전의 키스]는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친다. 남성 관객이라면 1991년판에서 관능적인 숀 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슬리버Sliver] (1991)

슬리버
이번에 개봉하는 [스텝포드 와이프]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아이라 레빈 원작 영화는 샤론 스톤이 주연한 [슬리버]겠다. 영화의 마케팅 전략 덕분에 원작소설도 함께 번역이 되어 나와있는데, 원작도 레빈의 다른 작품에 비해 범작이지만 영화는 더 심한 감이 있다. 조 에스터하즈의 각색도 불성실했지만 무엇보다도 [원초적 본능]의 성공 이후 샤론 스톤의 관능미에 총력을 기울여 만든 영화의 한계가 지나치게 많은 허술함을 만들어냈다. 오히려 영화 [슬리버]의 경우, 샤론 스톤이나 플롯보다도 넘버원 히트곡 [Can't help falling in Love]을 삽입곡으로 기억하는 관객이 더 많을 듯.

헐리웃에서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스티븐 킹만큼이나 아이라 레빈도 영화로 많이 만들어 지는 소설가다. 오히려 작가로서 스펙트럼과 강렬함은 더 빼어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문득 신작 [스텝포드 와이프]에서 레빈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전 영화를 곰곰히 되짚어보게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레빈의 이름때문일까.

당시 개봉 대기 중이던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에 맞추어 원작자인 아이라 레빈에 대해 다룬 무비스트특집 기사(원문)입니다. 참신한 분석이나 통찰보다는, 다른 매체에서는 잘 다루지 못할 정보를 정리한다는 접근이었기 때문에 소식 나열 수준이지요. 제 기사가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원 기사는 2004년 10월 4일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를 쓸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로즈마리의 아기〉의 경우 국내 개봉 제목은 〈악마의 씨〉였지요. 제 실수 입니다. 원문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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