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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2022) / 천명관 단평

출처: 다음 영화

부산 변두리 동네 구암 암흑가를 지배하는 손 영감(김갑수) 밑에서 굳은 일을 처리하는 박희수(정우)는 더 나이 들기 전에 돈을 벌어보려는 생각에 술 장사를 하는 양동(김해곤)과 함께 도박용 오락기 유통을 시작한다. 사업이 번창하여 부산 중심가까지 진출하자, 경쟁 관계로 손해를 보기 시작한 카지노 뒷배인 영도파를 자극하고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피할 수 없이 전쟁에 끼어든 박희수는 영도파에서 실무를 맡은 고아원 동기 철진(지승현)과 부딪치게 된다.

부산 변두리 마을 조직폭력배가 성공을 거두는가 싶더니 부산 유력 조직과 이권다툼에 엮여서 수라 같은 인생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가 상대 조직 실무자고, 영화 막판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보스를 배신하는 유혹에 빠지는 전개까지 [좋은 친구들] 같은 헐리웃 마피아 영화부터 [비열한 거리] [우아한 세계]에 이르는 한국 조폭물에 이르는 교과서적인 구도를 답습한다. 최소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붙이는 초반부와 예고편의 인상은 정확히 그것인데, 본격적으로 전개가 궤도에 오르면 꽤 달라지는 영화. 의리니 우정이니 하면서 포장한 비정한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따라가지만, 의외의 음모가 드러나고 두 조직 사이의 수싸움이 벌어지면서 정치극처럼 흘러가는 전개가 일품이다. 교과서적인 조폭물의 주제 의식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유려한 인물 관계와 섬세한 플롯을 이어서 배치해 독보적인 자리를 찾은 작품.

매력적인 인물과 독창적인 세부 플롯이 훌륭하고, 본격적으로 사건을 풀어가며 굳이 영화의 배경이 1993년인지 알 수 있는 치밀한 설정도 좋다. 하지만 짧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영문을 알 수 없이 지나가는 사건이나 (‘도다리’처럼) 중반부터 모호하게 사라진 인물, 복잡하게 안배한 음모가 드러나는 순간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갑작스러운 서술까지 잘 준비한 이야기의 맥락을 살리지 못하는 연출과 각색이 아쉽다. (원작이 있다는 것을 엔딩 크레딧에서 알게된 입장에서) 각색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생략과 편집의 한계를 이해하더라도 이야기 전개의 핵심이어야 할 사건과 (특히 철진과 송 영감처럼) 수싸움 과정을 통해 다층적인 인물 묘사가 가능했을 장면이 아쉽도록 가볍고, (용강이나 영도파 습격 전후처럼)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장면도 많아 여러모로 연출의 호흡이 딸리는 영화다.

흔한 조폭 미화의 함정을 잘 피해갔지만 유구한 선배 영화의 재탕으로 끝날 것 같은 이야기를 섬세한 설정과 사건, 촘촘한 인물로 매력적인 확장에 성공한 영화. 하지만 가능성 이상으로 영화를 풀지 못하는 화술이 이야기의 매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운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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